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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경제(이용훈주교) 1-10 요약

milarr 0 1,852 2017.01.06 13:03
가톨릭 시보 연재 "신앙과 경제 " (1-10)회 요약입니다.

(다운)신앙과 경제 1-10 요약



 


신앙과 경제 (1-10) 요약

천주교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곧 하느님 나라에 이어져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인간을 향하고 계신 하느님의 마음과 뜻을 배우는 것을 신학이라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어(헬라어) 테오스(theos, 신)에 로고스(logos, 학문? 말)가 합쳐진 단어인 신학은 말 그대로 ‘하느님에 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제란, 나아가 경제 윤리란 무엇일까요? 라틴어로 오에코노미아(Oeconomia?경제?經濟)는 사람이 재화를 생산하고 이를 통해 욕구를 충족시키는 활동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개념입니다. 즉,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는 달리 양이 한정되어 있어 매매나 점유의 대상이 되는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해서 소비에 이르는 모든 인간 활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노동을 포함한 경제활동이 한 인간과 가정, 사회와 인류에게 선익을 주는 일일뿐 아니라, 하느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거룩한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경제활동에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선악(善惡)과 진위(眞僞)를 식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잣대가 필요하게 됩니다.

경제윤리는 하느님의 뜻에 맞는 정의, 평등, 분배 행위가 올바르게 이루어지는지,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경제 행위의 모형과 전형을 찾는 일을 그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레오 13세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행복과 번영을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신앙에 따라, 모든 이가 물질적 자원과 부를 적절하게 분배하고 사용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시민사회는 경제 성장에 힘쓰면서 부(富)의 적절한 분배를 위해 노력하고, 약자와 가난한 이를 우선적으로 보호하며, 노동자에게는 정당한 임금을 지불해야 할 것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보는 사회 질서는 공동체의 정의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경제 질서의 쇄신과 바른 윤리질서에 따라서 모든 개인과 가정, 사회의 선익을 위해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야만 합니다.

우리 사회는‘가난’의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가난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이고 극복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가난의 척도나 범주는 다양하고, 한 인간이나 집단의 사상과 인격적, 지적, 영적 시각에 따라 가난을 보는 입장과 해석은 매우 다릅니다.

가난의 문제는 교회와 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교회의 삶의 자리가 세상이고, 바로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주님께 바르게 인도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가난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구약에는 사회적 약자, 타인의 보호와 도움이 필요한 자인 ‘에비욘(ebyo^n)’을 비롯해 신분과 지위 따위의 명예와 관련된 가난인 ‘달(dal)’, 가난의 일반적인 형태인 사회, 경제적 가난인 ‘라쉬(rasˇ)’, 가난에 대한 가장 강한 의미로 사회적인 불의와 억압에서 빚어진 가난인 ‘아니(a ̄ni^)’, 종교적인 의미로서 고난과 고통을 통해 영적으로 겸손한 자를 뜻하는 ‘아나우(a ̄na ̄w)’ 등 가난과 관련된 다양한 어휘들이 등장합니다.


신약에서도 가난의 다양한 실태를 엿볼 수 있는 말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가장 저급한 경제상황으로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만 하는 가난인 ‘페네스(pene ̄s, π´ενηζ)’와 페네스와는 달리 비참한 생활조건으로 도움이 필요한 절대적인 가난의 상황에 놓인 ‘프토코스(pto ̄chos, πτωχ´οζ)’가 있습니다. 프토코스는 ‘거지’ 혹은 ‘아주 가난한 사람’을 의미하지만 ‘하느님 앞에 비천한 사람’이라는 종교적 의미와 어감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상적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물욕을 포기하려는 노력’으로 가난을 선택하고 사랑하였으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보살피는 일은 우선적인 선택사항이며,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교회 사도직의 과제로 삼았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사회회칙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향한 관심을 늘 우선적으로 표명해오고 있으며,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는 사회상황에 대해 가차 없는 비판과 함께 의식전환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경제 사정으로 인해 빚어지는 문제는 가정과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 안팎에서도 가장 큰 논의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물질적 부족으로 나타나는 문제, 곧 가난의 과제는 교회가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로 가난 때문에 고통 받고 신음하는 세상을 그대로 보고 지나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사는 선의의 모든 이들을 기아, 질병, 빈곤, 식민주의의 잔혹, 생명의 극한 상황 등으로부터 해방시켜주어야 하고, 또한 그 목적을 달성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교회가 복음에 따라 도움을 청할 수조차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공동선이라는 시각과 관점에서 집단들의 선익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도움을 베풀어야한다는 사회적 관심과 배려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교황께서 가난 문제 해결을 통한 전 세계 모든 민족들의 발전과 생활수준의 향상을 위해 그리스도적 덕목인 연대성의 기치 아래 일치와 화목을 도모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대 이후 역대 교황들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여러 문헌들은 가난의 문제가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부여하신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기 위해 반드시 인류가 극복해나가야 할 과제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난의 문제는 이제 몇몇 개인이나 일부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고 전 세계, 온 인류의 문제가 된 지 오래입니다. 더욱이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신 경제적 발전과 도약을 이루고 있는 오늘날 가난의 문제는 인류의 존립,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께서 창조하고 배려하신 인간 존엄성의 존립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근대 산업화 과정에서 가난의 문제가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부의 불평등한 분배에서 비롯된 물질적 가난과 비참한 상황이 인간과 단체, 그리고 한 계층의 이기주의적 욕망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교회는 다양한 사회적 가르침을 통해 가난한 이들 편에 설 때, 그리스도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가난한 이들의 행복과 평화, 바람직한 자기성취와 만족을 위해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며, 인간의 진정한 품위와 존엄성이 제자리를 찾도록 인류를 위해 온전히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정신, 복음의 가치를 따라 친교와 나눔과 섬김의 삶에 충실하기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부치실 만큼 간절히 원하셨던 세상의 평화와 안녕, 정의가 바로 우리의 희생, 절제, 행위에 달려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이 솔선수범하여 주님 나라 건설을 위한 도구와 방편이 되지 않는다면 주님의 구원사업은 제자리에 머무르게 됩니다.

부자는 더욱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게 되고, 가난한 이는 더욱 가난해지는 이른바‘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현상은 가난한 이들이 기본권조차 누리지 못하게 해 인간이라는 존재감마저 상실하고 있습니다. 경제개발이 서서히 진행되더라도 서민과 대중의 인권이 보장되고, 도덕의식을 바로 세우는 일이 시급함에도 불구하고 인정과 도리를 외면하며 무자비한 폭력이 질주하는 현실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적 감수성을 지니는 게 마땅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육화(肉化)하셔서 이 땅에 오신 것도 결국은 인간적 감수성으로 인류에게 당신의 지극하신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눈으로, 곧 예수님의 사상과 의지, 관점으로 세상에 다가서려 노력할 때 그리스도적 감수성이 풍부해지리란 점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늘 가까이 하고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진리대로 살아가려 노력할 때만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주님을 닮고자 하는 마음, 바로 그리스도적 감수성도 주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값지고 은혜로운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적 감수성으로 바라볼 때, 오늘날 가톨릭교회가 세계화의 흐름에 대해 느끼는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경제적 불평등과 이로 인해 사회 전반으로 확산일로를 걷고 있는 소외계층을 품고 가야 하는 문제입니다. “세계화가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과 더불어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가난한 나라들을 경제적, 정치적 국제 관계들의 주변부로 몰아내는 경향을 낳고 있다”

경제 최우선주의, 실업, 공공 서비스의 감소와 저하, 환경과 자연 자원 파괴, 빈부 격차의 심화, 빈곤을 더욱 열등하게 만드는 불공정한 경쟁 등이 그러한 부정적인 결과입니다. 교회는 세계화의 긍정적인 가치들을 인정하면서도 세계화의 물결에 따르는 부정적인 측면들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장중심주의, 물질만능주의, 경제제일주의 등으로 이기주의적인 사고가 갈수록 팽배해가고 있고, 실업과 비정규직, 양극화, 빈부격차 문제는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들이 몰려있는 제3세계, 저개발국의 서민층, 특히 농촌과 농업, 자영업 등의 붕괴 문제는 한층 더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 안에서도 이러한 문제들은 구체화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한국교회의 사목적 관심과 연구, 대안의 모색은 긴박하고 절실한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세계화가 빚어내는 이러한 부작용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적 감수성으로 어떠한 방향과 자세를 갖춰 나가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며 판가름날 것 입니다.


신약에서도 가난의 다양한 실태를 엿볼 수 있는 말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가장 저급한 경제상황으로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만 하는 가난인 ‘페네스(pene ̄s, π´ενηζ)’와 페네스와는 달리 비참한 생활조건으로 도움이 필요한 절대적인 가난의 상황에 놓인 ‘프토코스(pto ̄chos, πτωχ´οζ)’가 있습니다. 프토코스는 ‘거지’ 혹은 ‘아주 가난한 사람’을 의미하지만 ‘하느님 앞에 비천한 사람’이라는 종교적 의미와 어감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상적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물욕을 포기하려는 노력’으로 가난을 선택하고 사랑하였으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보살피는 일은 우선적인 선택사항이며,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교회 사도직의 과제로 삼았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사회회칙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향한 관심을 늘 우선적으로 표명해오고 있으며,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는 사회상황에 대해 가차 없는 비판과 함께 의식전환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경제 사정으로 인해 빚어지는 문제는 가정과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 안팎에서도 가장 큰 논의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물질적 부족으로 나타나는 문제, 곧 가난의 과제는 교회가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로 가난 때문에 고통 받고 신음하는 세상을 그대로 보고 지나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사는 선의의 모든 이들을 기아, 질병, 빈곤, 식민주의의 잔혹, 생명의 극한 상황 등으로부터 해방시켜주어야 하고, 또한 그 목적을 달성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교회가 복음에 따라 도움을 청할 수조차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공동선이라는 시각과 관점에서 집단들의 선익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도움을 베풀어야한다는 사회적 관심과 배려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교황께서 가난 문제 해결을 통한 전 세계 모든 민족들의 발전과 생활수준의 향상을 위해 그리스도적 덕목인 연대성의 기치 아래 일치와 화목을 도모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대 이후 역대 교황들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여러 문헌들은 가난의 문제가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부여하신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기 위해 반드시 인류가 극복해나가야 할 과제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난의 문제는 이제 몇몇 개인이나 일부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고 전 세계, 온 인류의 문제가 된 지 오래입니다. 더욱이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신 경제적 발전과 도약을 이루고 있는 오늘날 가난의 문제는 인류의 존립,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께서 창조하고 배려하신 인간 존엄성의 존립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근대 산업화 과정에서 가난의 문제가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부의 불평등한 분배에서 비롯된 물질적 가난과 비참한 상황이 인간과 단체, 그리고 한 계층의 이기주의적 욕망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교회는 다양한 사회적 가르침을 통해 가난한 이들 편에 설 때, 그리스도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가난한 이들의 행복과 평화, 바람직한 자기성취와 만족을 위해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며, 인간의 진정한 품위와 존엄성이 제자리를 찾도록 인류를 위해 온전히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정신, 복음의 가치를 따라 친교와 나눔과 섬김의 삶에 충실하기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부치실 만큼 간절히 원하셨던 세상의 평화와 안녕, 정의가 바로 우리의 희생, 절제, 행위에 달려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이 솔선수범하여 주님 나라 건설을 위한 도구와 방편이 되지 않는다면 주님의 구원사업은 제자리에 머무르게 됩니다.


부자는 더욱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게 되고, 가난한 이는 더욱 가난해지는 이른바‘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현상은 가난한 이들이 기본권조차 누리지 못하게 해 인간이라는 존재감마저 상실하고 있습니다. 경제개발이 서서히 진행되더라도 서민과 대중의 인권이 보장되고, 도덕의식을 바로 세우는 일이 시급함에도 불구하고 인정과 도리를 외면하며 무자비한 폭력이 질주하는 현실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적 감수성을 지니는 게 마땅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육화(肉化)하셔서 이 땅에 오신 것도 결국은 인간적 감수성으로 인류에게 당신의 지극하신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눈으로, 곧 예수님의 사상과 의지, 관점으로 세상에 다가서려 노력할 때 그리스도적 감수성이 풍부해지리란 점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늘 가까이 하고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진리대로 살아가려 노력할 때만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주님을 닮고자 하는 마음, 바로 그리스도적 감수성도 주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값지고 은혜로운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적 감수성으로 바라볼 때, 오늘날 가톨릭교회가 세계화의 흐름에 대해 느끼는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경제적 불평등과 이로 인해 사회 전반으로 확산일로를 걷고 있는 소외계층을 품고 가야 하는 문제입니다. “세계화가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과 더불어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가난한 나라들을 경제적, 정치적 국제 관계들의 주변부로 몰아내는 경향을 낳고 있다”

경제 최우선주의, 실업, 공공 서비스의 감소와 저하, 환경과 자연 자원 파괴, 빈부 격차의 심화, 빈곤을 더욱 열등하게 만드는 불공정한 경쟁 등이 그러한 부정적인 결과입니다. 교회는 세계화의 긍정적인 가치들을 인정하면서도 세계화의 물결에 따르는 부정적인 측면들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장중심주의, 물질만능주의, 경제제일주의 등으로 이기주의적인 사고가 갈수록 팽배해가고 있고, 실업과 비정규직, 양극화, 빈부격차 문제는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들이 몰려있는 제3세계, 저개발국의 서민층, 특히 농촌과 농업, 자영업 등의 붕괴 문제는 한층 더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 안에서도 이러한 문제들은 구체화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한국교회의 사목적 관심과 연구, 대안의 모색은 긴박하고 절실한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세계화가 빚어내는 이러한 부작용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적 감수성으로 어떠한 방향과 자세를 갖춰 나가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며 판가름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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